업(業)

 

"업이 깊구나"하는 말을 흔히 쓴다. 업이라는 말은 현재 비교적 깊게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업에는 어쩐지 숙명적 느낌이 드는 불교적 음습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업은 윤회사상의 잘못된 이해에 의한 업일 뿐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즉 윤회에서의 업은 윤회를 구동하는 보편적인 지배력으로써 숙명의 근원이다.석존은 이 숙명의 근원이며 중생의 고의 근원인 업에서 이탈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연기의 법이다. 따라서 불교의 업은 숙명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윤회의 업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의 발전과정에서 업은 수행상 계율의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구사에서는 특히 상세하게 고찰되었고,그사이에서 불교 본래의 업의 의미가 왜곡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구사론의 세별유업생(世別由業生), 즉 유정이 육도의 어느 곳인가에 태어나는 것은 업에 의한 것이다.라는 말에 상징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인과응보의 논리를 강조하는 나머지 연기의 법을 잊었지 않았는가 하는 일면도 보이고 있다.

하여간 업의 개념은 항상한다는 존재를 기조로 하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써, 무상을 기조로 하는 불교의 논리와 모순된 것이다. 유식에서는 업의 취급을 구사에 비해서 훨씬 합리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여간 업에는 나의 이해를 초월한 종교적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업은 불교가 악용되거나 오해되는 원인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불교에서의 업의 사상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아도 연기의 법으로 잘못되지 않게 충분히 전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음에 불교의 업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가 마음(의=意)를 움직여 말을 하고(구=口), 혹은 몸(신=身)을 움직이고, 혹은 행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안에 미래를 향해서 얼마간의 영향력이 남는 것이 있다. 이 힘이 인생에 있어서 미래의 드라마를 연출한다고 불교에서는 생각하고 이 것을 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업의 달마는 인생의 달마에서 연출가로 역할을 하고, 다른 달마는 배우로 역할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행위를 지목해서 업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업이라고 말하는 한 그 배후에 업 본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업은 세분된 형태로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불교에서 업의 중요한 특징에 관해서 개별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 불교에서의 업은 달마의 하나로써 연기의 법을 따른다.

불교에서 업은 과거부터 현재, 혹은 현재부터 미래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달마의 하나로써 연의 지배아래 영향을 미친다.

2) 불교의 업은 주체적이다.

우리는 짧은 과거를 짊어지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의 발생이래의 깊은 업을 짊어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들어도 인류는 미래를 향해서 무한한 업을 쌓면서 살아가게 되어 구제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체적인 입장에서 과거의 업을 돌아보면 사정은 다르다. 과거의 업이 어떤 것이던 그것이 연과 같이 지금에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업에 관해서도 지금이 모두이다. 그러나 이 위에 불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3) 업은 이숙(異熟)한다.

업이 이숙한다 함은 선업은 선과(善果)를 가져오지 않고 락과(樂果)를 가져오게 되며 악업은 악과(惡果)를 가져오지 않고 고과(苦果)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고락은 이 경우의 하나일 뿐 선악에 관해서 적극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무기여서 업의 달마가 연을 얻을 때 까지 고락의 무기로 질을 변하는 것이 된다. 이것을 이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모든 사람이 현재의 찰나에서 선악에 관해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미래를 향해서 어떤 악업을 범한 자도 어떤 선업을 쌓은 자도 지금은 항상 평등한 입장에 있다고 불교는 생각하고 있다.

죄를 범하면 범한 죄(악업)에 괴롭힘을 당하는 고를 갖게 된다. 만일 "이 고를 두 번 다시 맛보기 싫다"라고 한다면 선업을 싸려고 하는 의지는 죄가 없는 사람보다 강할 것이다. 그러나 선업으로 높은 지위(락)을 얻은 자가 더 큰 선업을 쌓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지위를 악용해서 큰 악업을 쌓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미래를 향해서 선인가 악인가는 과거의 업에 관계없이 지금의 형태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 된다. 불교는 여기에 인과응보의 도리를 설하여 수도와 윤리도덕의 논리, 그리고 구제의 길을 세웠다.

선악이 지금의 형태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행위의 선악이 그 때에 활동한 심리적 요인, 즉 동기에 맡겨진 것에 불과하다. 불교의 윤리가 선악에 관해서 동기론을 취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것은 불교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과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스스로 쌓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에 의해서 쌓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또 악업이냐 선업이냐는 당사자가 고락이라는 형태로 갚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업은 윤회의 그것과 같이 인과응보의 사상 위에 있으나 주체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업과 큰 차이가 있다.

업에 선 악 무기의 삼업이나 신 구 의의 삼업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말했는데 욕계 색계 무색계의 어느 곳에 태어나는가, 혹은 육도(六道)의 어느 곳에 태어나는가 하는 일생의 경우를 결정 짓는 업과, 용모 부귀 비천 건강 등  사람의 특징을 결정 짓는 업이 있다고 불교에서는 생각해서 전자를 만업(滿業)이라 하고 후자를 인업(引業)이라고 불러 구별하고 있다. 이 경우 인업이 주는 결과를 총보(總報)라고 하고, 만업이 주는 결과를 별보(別報)라고 부르고 있다.

구사나 유식이나 다같이 업에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같이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는 것은 사람들이 공통된 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이러한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반해서 행 불행과 같이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은 개별적인 업에 의해서 가져오게 된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불공업(不共業)이라고 부르고 있다.

업은 인과응보를 미치는 잠재영향력이기 때문에 연기의 법에 모순된 개념이다. 그러기 때문에 업의 특징성을 구사에서는 업을 실재하는 달마라고 하고, 유식에서는 기억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업은 번뇌에 의해서 생긴다고 했는데 한편 업과 번뇌의 관계는 종자와 물의 관계에 비유되어 가령 업이 있어도 번뇌가 없으면 업은 고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번뇌를 끊으면 고락이 없어지고 열반을 얻게 된다는 논리가 세워진다. 여기에서도 업과 번뇌를 실재의 달마라고 생각하는가, 실재가 없는 임시적인 가짜인가라고 생각함에 따라 구사와 유식으로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구사에서는 마음의 활동은 밖으로부터 살필 수 없으나 몸이나 입이 하는 일은 마음에 영향을 남길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소리로 밖에 나타나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마음에 남는 업과 표현되어 남는 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음에 남은 업을 무표업(無表業)이라 하고, 표현된 업을 표업(表業)이라고 한다.

업중에서 표업은 찰나에 멸하여 미래에 남지 않고, 무표업은 달마로 잠재적으로 남아 영향력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말하는 업은 무표업과 의업의 두 가지를 합해서 말하는 것이 된다. 구사에서는 무표업의 달마를 무표색의 달마라고 부르고 색법중에 분류해 두었고, 개념적 존재이지만 물질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전제 위에 계율을 지키고 선업을 쌓고, 번뇌를 하나 하나 끊어 열반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정치한 수도상의 논리를 세우고 있다. 구사에서는 언동은 계율과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계율의 관점에서 무표업을 다음과 같이 셋으로 대별하고 수행의 각 단계에 대응해서 다시 세분하고 수행의 과정에 대해서 번잡한 설명을 하고 있다.

율의무표(律儀無表) : 계율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생기는 선업.

불율의무표(不律儀無表) : 의식적으로 계율을 파함에 따라 생기는 악업

처중무표(處中無表) : 무의식적인 행위에 의해서 생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업.

 

유식에서는 붉다. 노랗다. 꽃이다 하는 등 전5식에서의 정보에 말나식과 의식이 관계되어 아름답다. 욕심 난다. 등의 번뇌가 생긴다고 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는데 의식에 수반된 심리작용은 말에 의해서 자각되어 번뇌가 됨과 동시에 그 작용은 말에 의해서 더 강한 것이 되어 업이 남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업에 관계되는 심리적 요소를 달마로 하여 사(思)의 심소에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사의 심소에 속하는 달마는 다른 달마에 선악의 색칠을 하는 달마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업의 기억은 그 데이터가 기억에서 고락(무기)으로 질적 변화(이숙)를 하나 업 이외의 기억에서는 그 데이터의 질에 변화가 없이 항상 무기라고 불교에서는 생각하고 있다. 이래서 업에 관한 기억을 업종자라고 하여 다른 기억과 구별하고, 그 데이터를 특히 이숙습기(異熟習氣)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업종자도 종자임에는 틀림이 없어 임시적인 가짜로써 다른 종자와 다름이 없다. 따라서 업종자라 해도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과정에 의해서 시간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유식은 말하고 있다.

유식에서도 현성력(現成力)의 약한 무기의 종자는 현성력의 강한 업종자의 힘을 빌려 비로소 현성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생의 머리에 현성되어 있는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은 고락의 어느 것인가에 색칠되어 있는 것이 된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고의 근원은 업이고, 그 근원이 번뇌고, 자아에 바탕을 둔 미혹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유식의 입장이다. 미혹에서 탈각, 즉 번뇌에서의 해탈을 꾀하는 것이 이 입장에서도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아에 바탕을 둔 마음의 얽매임에서 떠나는 과정이 수행의 과정이 되어 있다.

과거세의 업의 결과로써 현세가 있다는 것을 삼계유심(三界有心)이라고 하는 유식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현세를 행하는 아뢰야식은 과거세의 업의 총보이며 전6식은 각각의 존재방식을 특징시키는 것으로써 과거세의 업의 별보라고 할 수 있다.